[생명과학논단] 홍성욱 교수 - 잡종적 지식인 서울대 생명과학부 (세계일보 1월14일)

2009-01-22l 조회수 4980

[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잡종적 지식인 서울대 생명과학부 홍성욱 교수한국사회 고질병 대립과 갈등 해소잡종의 학문 통해 명쾌한 해법 제시캘리포니아 공과대학(캘텍)은 미국 대학들 중 학비 부담에 대비해서 최고의 교육 품질을 자랑한다. 이 대학 교수식당은 테이블에 8명의 교수가 모두 자리에 앉아야 식사 주문을 받는다. 교수들은 식사주문을 기다리면서 옆자리나 맞은편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항상 같은 학과 교수와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 한 다른 전공 교수와도 대화를 해야만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서로 관심사는 다르지만 다른 분야의 학자에게 참신한 조언을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학자의 조언으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서 연구 아이디어를 얻는 일도 많다.이는 융합의 학문과 과학적 창의성을 부르는 잡종의 학문을 주창하는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홍 교수는 대표적인 잡종적 지식인이다.* 잡종적 지식론의 선구자잡종적 지식인은 주력 분야 이외에 다른 학문을 이해하려는 진실한 노력을 펼칠 때 탄생한다. 홍 교수의 잡종론은 통섭과 구별된다. 잡종과 통섭은 일단 이웃 학문과 소통을 꿈꾼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특징을 지닌다. 처음 소개될 때만 해도 통섭은 새로운 말이었지만, 잡종은 익숙한 말이었다. 통섭은 학문에 핵심이 있다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이지만 잡종은 대상 사이에 상·하위 개념을 두지 않는다. 홍 교수가 잡종적 지식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튼실한 학문적 토양 덕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학사 시절 배운 순수 물리학에 박사과정에서는 인문적인 지식을 융합시킨 것이다.새해 초 서울대 생명공학관 연구실에서 홍 교수를 만났다. 여기서 잠깐. 홍 교수와의 인터뷰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대상 학자를 선정할 때면 고민한다. 기사 작성 몇 주 전부터 인터뷰 대상 예비 후보를 추리고 그의 저술을 읽는다. 고민은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만난 학자들 중에서 서울대를 졸업한 이는 많았지만, 서울대에서 강의하는 현역 교수는 없었다. 정년퇴임한 교수를 제외한다면 그는 이 시리즈에서 처음 만난 서울대 현역 교수이다. 이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저술로 이름을 알린 서울대 교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한국사회에서 서울대가 가진 의미를 고려한다면 곱씹어볼 내용이다.* 두 학문의 접촉은 여행자의 시선으로홍 교수는 두 가지 전공 분야를 넘나드는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과학과 인문학의 접촉을 늘려가야 한다.인문학이 가치를 다루고 과학을 사실을 다룬다는 이분법을 고수한 상태에서는 둘 다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지요.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소통은 조심스러운 접촉에서 시작돼야 합니다. 조심스러운 접촉을 위해서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다른 문화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지요.접촉을 위해서 그가 주문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여행자의 방식이다.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처럼 행동하라는 조언이다. 지도를 놓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여행객처럼 지식의 세계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분야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여행의 매력으로 꼽듯이, 다른 관점에 의해 도전을 받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최근 출간한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서울대출판부)에서 융합시대의 과학문화를 논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과학과 인문학 외에도 과학과 예술, 과학과 건축, 과학과 언어 등을 통해 과학문화와 여타 문화를 비교해 풀어냈다.과학 연구자인 홍 교수가 잡종 학문을 강조한 것은 10년이 넘었다. 최근 개정판 3쇄를 찍은 하이브리드 세상읽기(안그라픽스)에서 그는 잡종의 시대를 선언했다. 맺음말에서 우리가 꿈꾸는 바람직한 사회는 시장과 규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효율과 평등, 발전과 분배의 잡종 가능성에 달려 있다며 지금 우리는 대립적인 정치, 경제, 사회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짬뽕시키기 위해서 더욱 많은 잡종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그가 말하는 잡종론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잡종 의식은 그동안 살펴보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실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기에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성격도 지닌다. 당연히 책임감 혹은 책임성도 있어야 한다. 학문에서 잡종적인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을 바라보는 해석의 눈높이를 높여야 한다. 다른 학문을 보는 눈높이의 수준이 올라갈 때 자신의 전공 분야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난해 하반기에 출간한 홍성욱의 과학에세이(동아시아)에서는 이 점이 강조됐다. 과학 속에서 사회 읽기와 사회 속에서 과학 읽기를 주문한 것이다.* 밀어내야 할 21세기판 학문 쇄국주의인문학과 과학전공자에게 공평한 제안을 내놓았다. 먼저 과학 전공자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사실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으로 인문사회 학자에게도 주문 사항을 내놓았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와 지금 사는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자는 제안이다.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학문의 벽이 견고하다. 분과 학문의 성채 안에 다수의 연구자가 장막을 구축하고 있다. 다른 분야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자기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외부의 긍정적인 영향마저 원천봉쇄하는 실정이다. 분과 학문 내에서는 적어도 21세기판 쇄국정책이 확고하게 실행되는 상황이다.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현대사회가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회이지만 창조적인 전문지식은 하나의 좁은 분야에 얽매어 만들어지기 힘들다는 데 동의한다.연구자들만 하더라도 학부를 마친 다른 대학원에서 후속공부를 하고, 박사 후 과정은 다른 대학에서 하는 게 필요합니다. 다른 문화를 가진 도시와 나라를 옮겨다니며 새로운 지식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지요. 학자가 돼서는 다른 학문의 전공자와 함께 열린 대화와 공동연구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학문 영역의 교류를 위해서는 인위적인 문·이과 구분을 재고해야 한다는 게 그의 또 다른 제안이다. 문·이과 구분으로 교양인과 지성인을 길러낸다는 대학에서 지성인 양성이 차단되는 상황이다. 이공계 학생들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 수업은커녕 인접과학의 교양수업도 들을 수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문사회계 학생들이 과학적 지식을 함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반쪽 지식인 양성에 목을 매는 우리 실정을 보노라면 슬픔마저 밀려온다고 그는 강조한다. 독일에서는 주부들도 칸트의 저서를 읽고, 영국에서는 간호사들도 뉴턴과 다윈의 이론을 편하게 이야기합니다. 한국에서는 전공이 아니라면 대학 교수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이들은 일상에서 하고 있지요. 자신의 전공만을 우선시하고 다른 분야와 대화를 거부하는 문화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우울한 처지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